봇치 더 락 마이너 갤러리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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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는 지금쯤 동이 트고 있으리라.
일어나기엔 아직 이른 시간.
어젯밤엔 깊이 잠들지 못한 것 같다.
몸을 일으키자 옆자리에 키타쨩이 누워있다.
잠에서 깼을 때 눈앞으로 보이는 붉은색 머리카락에는
아직까지도 적응이 안된다.
사귄지 반년.
주말이면 이렇게 같은 이불에서 자는 것이
어느새 당연한 일과가 되어있었다.
평소 같으면 서로 껴안거나, 손을 잡거나, 팔베게를 해주며
자곤 하지만, 지금의 키타쨩은 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어젯밤 내가 키타쨩을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인기피증 때문에 친구라고는 한명도 없는 내가,
처음으로 사귄 애인을 상대로 잘 행동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인생을 보내온 나의 잘못이었다.
평범한 여고생으로 살아왔다면 키타쨩을 이렇게나
속상하게 만들지 않았겠지.
키타쨩이 일어나면 제대로 사과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곱슬기가 없는 생머리에 손을 뻗자
키타쨩이 몸을 옆으로 뒤척였다.
어라......? 뭔가, 평소랑 다른데......?
머리카락과 이목구비는 나의 애인인 키타쨩이 맞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이 든다.
뭐가 다른 거지?
뻗으려다 만 손을 그대로 뺨에 가져다 댄다.
스킨케어에 여념이 없는 그녀의 매끈매끈한 피부.
응, 틀림없이 키타쨩이다.
「......으응, 히토리쨩......?」
「아, 조, 좋은 아침이에요......」
잠에서 깨워버렸다는 죄악감과 함께,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키타쨩도 귀엽다고 생각해버린다.
「뭔가 오늘...... 히토리쨩 귀엽다」
후훗, 하고 웃는 키타쨩.
애교가 섞인 말투였지만, 그 미소에는 뭐랄까,
색기 같은 것이 녹아들어 있었다.
「히토리쨩, 자!」
양팔을 펼치는 키타쨩.
에? 뭐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일단 똑같이 팔을 펼쳐보인다.
「후후, 히토리쨩 쑥스러워 하는 거야?」
키타쨩은 펼친 팔을 내 목에 감더니
그대로 다가와 키스를 해준다.
한번, 두번, 세번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쪽하고 소리를 내며 키타쨩의 입술이 떨어진다.
「저, 저기, 키타쨩 방금 건......」
「키타쨩이라니, 오랜만에 들어보네.
아침 키스 정도는 매일 하고 있잖아. 아직 잠 덜깼어?」
「아, 아아아아 아침, 키스......!?」
「히토리쨩 그렇게 굳어있으니까 꼭 고등학생 때 같다」
「......에」
「에」
키타쨩이 놀란 표정으로 내 방을 빙 둘러본다.
「여기 히토리쨩 본가잖아!
그러고 보니 맨날 자던 침대가 아니라 이불이고!」
놀랐다기 보단 왠지 기뻐 보이는 키타쨩.
당장에라도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을 듯한 기세다.
배개맡을 뒤적였지만 핸드폰이 나오지 않자,
키타쨩은 손을 그대로 내 얼굴로 뻗어 양쪽 뺨을 덥석 잡는다.
「히토리쨩!」
「후엣!?」
「히토리쨩 지금 몇살이야?」
「에, 저기, 16살이요......」
「16살!? 혹시 고등학교 2학년?」
「아, 네......」
키타쨩은 꺄~ 어떡해~ 부럽다~ 등을 연발하며
아무튼간 정신없이 떠들어댄다.
「저, 저기, 당신은 키타쨩......이죠?」
「맞아. 키타 이쿠요, 27살 입니다~」
「27......!!??」
「그건 그렇고 16살 히토리쨩 너무너무 귀엽다!
물론 지금도 비주얼 깡패지만, 이 시절의 때묻지 않은
히토리쨩도 정말 최고야!」
「아, 저기 키타쨔, 키타 씨도, 엄청나게 예쁘시달까......
꽤나 달라지셨네요......」
「정말!?」
27살이라는 키타 씨는 정말로 아름답다.
물론 지금의 키타쨩도 무지막지하게 귀엽다.
하지만 이 키타 씨는 얼굴만 예쁜게 아니라 어른의 여유
같은 걸 지니고 있었고, 그런 것들이 모두 자극적으로 다가와
더이상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그렇게 버티다 못해 고개를 숙이던 도중
나의 시선은 어느 한 부분에서 우뚝 멈췄다.
......내가 아는 키타쨩은, 뭐랄까, 좀 더, 여리여리 하달까,
슬렌더 체형이었는데, 눈앞에 있는 것은 그렇지가 않았다.
「히토리쨩도 차암, 여기가 신경 쓰이는 거야?」
「앗! 죄, 죄송해요, 이상한 눈으로 본 건 절대 아니구요!」
키타 씨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신체 부위를 꾸욱 누른다.
세상 부드러워 보이는 그곳에서는 말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게 아니라!!
이, 이거 성희롱인가!? 성희롱은 혹시 사형!?
아아아아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어른이 된 키타쨩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다!
「만져볼래?」
「히익! 사, 사양하겠습니다......!!」
이 이상 죄목을 추가할 순 없어!
「히토리쨩이 키워준 건데 말야~」
키, 키워줬다고!? 대체 무슨 소리지!?
땅을 갈고, 도랑을 파고, 묘목을 심고, 비료랑 물을 주면......
수확의 시기가 다가와서 키타쨩의 가슴이 커지는 거야!?
올해는 풍작이로세!!
「허둥대는 히토리쨩도 귀여워」
키타 씨, 그렇게 미소짓지 말아주실래요?
제 안에서 무언가가 눈을 뜰 것 같아서요......
아, 머리 쓰다듬지 마세요......!
「그나저나 너무 좋다. 요즘엔 히토리쨩한테 온갖 유혹을 해봐도
여유로운 태도를 보여서 분했거든」
「저, 저한테 그런 여유가 있을 리......」
키타 씨는 나의 목에 팔을 감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언니가 이것 저것 가르쳐 줄까?」
「뭐, 뭐를요!?」
「응~? 어디를 어떻게 만져야 내가 좋아하는지, 같은?」
코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와 뜨거운 시선.
「알고 싶어?」
키타 씨가 나의 목덜미를 살며시 어루만진다.
「히토리쨩, 만져줘......」
아, 더이상은 안돼. 녹아버리겠어.
「어머, 너무 괴롭혔나」
복구 작업은 17살의 키타쨩보다 숙련된 솜씨로 진행되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키타쨩이 10년 후의 모습으로......」
「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자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그, 그렇게 간단히 넘기시다니......」
어른이 되어도 적응능력은 여전히 뛰어난 것 같다.
「그래! 모처럼이니 사춘기 히토리쨩의 고민이라도 들어줄까?」
키타 씨가 눈을 키탕~ 하고 빛낸다.
「얼른 말해봐. 17살의 나한테 불평할 거 있으면 해도 돼」
「부, 불평이라니 당치도 않아요! 저같은 게 키타쨩이랑
사귈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기적인걸요. 아무 불만도 없어요......」
「에~ 그러지 말고~ 나 고등학생 때 엄청 귀찮은 성격이었잖아.
......그건 지금도 그런가」
쓴웃음을 지으며 키타 씨가 말한다.
「샴푸나 립밤 바꾸면 바로 알아채 달라든가, 잠들 때까지 같이
로인 해달라든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눈치채 달라든가.
지금 생각하면 히토리쨩한테는 꽤나 허들이 높은 것만 요구했었네」
「아, 그, 그건......」
「게다가 히토리쨩은 이소스타 핫플도 절대 가고 싶지 않았을 텐데
억지로 끌고 다니기나 하고 말야」
뭐...... 귀여운 애인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었달까.
청춘 컴플렉스에 의한 대미지는
링거를 왕창 맞으면 회복되기도 했고.
「......히토리쨩은 언제나 상냥하니까, 그것에 제대로 감사하면서
소중하게 대했어야 했는데......」
방금까지 밝았던 키타 씨의 표정이 한순간에 어두워진다.
에? 뭐지 이 분위기는?
설마, 10년 뒤 나와 키타쨩은......
최악의 미래를 상상하고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저, 저기, 키타 씨......」
「요즘 히토리쨩이 같이 목욕을 안해주는 거 있지!」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평생 키타쨩한테 못당할 것 같다.
「처음엔 내가 먼저 같이 하자고 했고, 한동안은 히토리쨩도
싫지 않은 눈치였거든?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목욕은 따로
하자는 거야! 어떻게 생각해!?」
어, 어떻게 생각하냐니......
애초에 지금의 나에겐 키타쨩과 같이 목욕을 할 배짱도 없는데.
그야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지만.
「아 미안! 히토리쨩한테 상담을 해준다면서 내 이야기만
늘어놔 버렸네. 히토리쨩은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저기, 그럼...... 미래엔 제가 키타쨩을 화나게 하거나
싸움을 하는 일이 없어지나요?」
목욕에 대해서는 키타 씨가 불만인 것 같지만
싸움이라고 보기엔 힘들 것 같다.
그보다도 지금 내가 키타쨩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려줬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는 키타쨩을 실망시키지 않고
버림받지 않을 방법을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음...... 싸움은 더 많이 하긴 해.
싸움이라기 보단 불평이나 잔소리?」
「자, 잔소리......?」
「내가 목욕을 너무 길게 하니까 히토리쨩이 자기보다 먼저
목욕하지 말라고 불평하기도 하고, 히토리쨩이 맨날 밤을 새면
내가 일찍 자라고 한마디 하는 식이야. 목욕은 같이하면 해결될
문제인데 말이지」
목욕을 계속 마음에 두고 있네.
「제가 키타쨩한테 그런 불평을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역시 10년 후에도 키타쨩을 화나게 하고 있네요......」
키타쨩한테는 종종 『소녀의 마음을 공부하라』는 말을 듣는데,
어쩌면 나는 키타쨩의 애인으로 적합하지 않은 거 아닐까.
「어, 어제도 SNS에 셀카 올리는 걸 조금 자제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키타쨩이 화를 내더라구요...... 키타쨩은 귀여우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억지를 부린 게 잘못이었어요......」
「히토리쨩, 그거 전부 나한테 말했어?」
「에......?」
「지금 나랑 히토리쨩은 소소한 불만들도 참지 않고 전부 말할 수
있는 사이인데, 그 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고 생각해」
「신뢰...... 하지만 그건 긴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생긴 거겠죠......」
「그 말도 맞아. 하지만 16살 짜리 히토리쨩이라도 나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어」
「뭐, 뭔데요 그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야」
「좋아...... 한다고요?」
「나도 연애는 처음이어서, 처음으로 생긴 애인에 대해 불안감을
가질 때도 있었어. 히토리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워낙 말수가 적다보니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걸까 하고 고민하기도 했지」
키타 씨의 쓸쓸한 표정을 보고 두려운 감정이 올라온다.
나는 키타쨩에게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더라.
어쩌면 고백하고 나서 한번도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0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원해서 히토리쨩
곁에 있는 중이야」
키타쨩 씨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초조해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제대로 나한테 전해줘.
너는 무척이나 사랑받고 있다고」
17살의 키타쨩이 돌아온다면,
사과보다도 먼저 사랑을 고백하자.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그 한마디를.
과연 이 감정을 전부 키타쨩에게 전할 날이 올까.
아니, 느긋하게 생각하자. 인생은 기니까.
「아, 그리고 물론......」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키타 씨가 말한다.
「나도 히토리쨩을 정말 좋아해」
10년후의 키타쨩은 겉모습도 사고방식도 성숙해져서
지금의 키타쨩과는 다른 사람같다.
하지만 역시 키타쨩은 키타쨩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깨닫자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자, 이만 잘까. 히토리쨩 졸리지?」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부드럽게 안긴 채로 느끼는 체온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따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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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쿠요쨩의 가슴이 쪼그라들었다!? 어째서!?」
짝.
섬세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어 선택에,
말보다도 손이 먼저 나가버렸다.
「......그렇군. 즉, 그쪽은 26살의 히토리쨩이고,
아까 전의 발언은 27살의 나와 비교해서 한 말이었네」
「아, 네. 죄, 죄송했습니다......」
침대 아래서 도게자를 하고 있는 이 사람.
키가 조금 크고 머리카락도 많이 짧지만,
아무래도 10년 후의 히토리쨩이라는 것 같다.
보자마자 실례되는 말을 하길래 무심코 뺨을 부풀리긴 했는데,
이 히토리쨩 너무 잘생긴 거 아냐?
평소에는 앞머리로 가려져 있는 파란색 눈동자가
지금은 확실하게 보인다.
피부는 변함없이 투명한 흰색.
왼쪽 뺨은 살짝 빨개져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만......
「저, 저기...... 왜 그러세요......?」
「아, 미안. 정말로 히토리쨩인가 싶어서. 커트는 언제했어?」
「그게, 고등학교 졸업했을 즈음에요......」
「그렇구나」
긴 생머리 히토리쨩도 좋지만, 울프컷 히토리쨩도 좋네.
이렇게나 근사한 히토리쨩이 기타를 치면
두말 할 것 없이 멋지겠지.
이 헤어 스타일을 제안한 사람은 천재가 틀림없다.
「이쿠요쨩이 미용실에 따라와서 디자이너한테 뭐라 말하더니
이렇게 됐어요......」
천재는 나였다.
「한가지만 더 물어봐도 돼?
아까부터 간지럽게 왜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이, 이쿠요쨩이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어요.
성씨는 나중에 같아질 거라면서......」
나는 바보였다.
「......저기, 우리 결혼 했어?」
「아, 안했어요! 아직은!」
아직이라는 건 히토리쨩한테 그럴 마음이 있다는 거네.
흠흠. 뭐어, 10년이나 같이 지냈으면 당연하려나.
「그래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 같으니 안심이야.
10년 동안 계속 사귀기 쉽지 않잖아」
「아, 아뇨, 아, 네」
「응?」
방금 한번 부정하지 않았나?
「히토리쨩, 10년 동안 같이 있는 거 맞지?」
「그, 그렇죠 뭐...... 밴드도 있으니까요」
갈 곳 잃은 시선으로 분명치 않은 대답을 하는 히토리쨩.
「10년 동안 사귄 거지?」
「저기, 그게...... 딱 한번 헤어진 적이 있어요......」
......간담이 서늘해진다.
우리들의 밝은 미래만 생각했던 나는
그런 슬픈 일을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그게, 작은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랄까.......
서로에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말 못하고 있다가......
그게 폭발해버려서, 그래서......」
히토리쨩이 쓴웃음을 지으며 털어놓는다.
짐작 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무서워진다.
작은 불화가 쌓여서 히토리쨩과 헤어진다니 생각하기도 싫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조차 힘들다.
「아, 그, 그치만 떨어져 있다 보니 이쿠요쨩이 소중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고,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니까, 안심해주세요......!」
「별로 위로가 안되는데......」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인 걸요!
헤어진 기간도 잠깐 동안이니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뭐, 결과적으로는 사귀고 있다는 거니까 괜찮으려나.
아니, 그래도 못 받아들이겠어......!
일시적이라곤 해도 이렇게나 예쁜 히토리쨩이 싱글이 된다면
주위에서 가만히 안놔둘 거 아냐.
내가 모르는 사람과 웃으며 걸어가는 히토리쨩의
뒷모습을 상상한 것 만으로 뇌가 파괴될 것 같아......!
「우으으 아무튼 싫어어~~!!!」
「우왓! 이쿠요쨩 울지 마세요! 아, 기, 기타 쳐드릴게요!
들어주세요, 『이쿠요쨩 울지마 봇치 버전』!」
「그건 됐어」
「앗, 10년이나 차이나는데도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이 사람이 내가 아는 히토리쨩이라는 걸 확신했다.
이런 점은 변하지 않는구나......
「히토리쨩은, 헤어졌을 동안 다른 사람이랑 사귄 적 있어......?」
「그, 그럴리가요! 저는 쭈욱 이쿠요쨩 일편단심이었다구요!」
음량조절에 실패한 목소리가 허둥지둥 선언한다.
아까부터 기분이 롤러코스터 처럼 오르내린다.
히토리쨩의 허둥대는 모습을 마냥 비웃을 처지가 못되네.
「......저는 이쿠요쨩이랑 함께 있는 것 만으로 행복해요」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구나.
히토리쨩은 항상, 나랑 사귀는 게 기적 같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
표정에서 행복감이 묻어나오긴 했지만.
「아, 물어보지는 않았는데요, 아마 이쿠요쨩도 다른 누군가랑
사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서로 뭐든지 알 수 있는 관계가 부러워.
빨리 그렇게 되고 싶어」
「......그런 관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려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죠. 중요한 건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아요. 안그래도 우리는 정반대의 사람이니까요」
내가 알고 있는 파란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과연 중요한 것을 말로 표현하고 있을까.
평소엔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달라 요구를 해대면서,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말없이 눈치를 챙겨주길 바랐다.
히토리쨩도 말하고 싶은 게 있었을 텐데,
그걸 말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가 만들고 있었다.
심지어 어제는 처음으로 히토리쨩이 나한테 부탁을 했는데,
나는 그걸 보기좋게 걷어찼다.
나 정말 나쁜여자 같아.
이래서 히토리쨩이 떠나버렸던 걸까.
「이쿠요쨩?」
「나, 어제 히토리쨩한테 진짜 못되게 굴었다......? 히토리쨩이
나름대로 걱정을 해준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SNS에 셀카를 올리는 건가요? 인터넷을 너무 분별없이
사용하는 거 아닌가요? 이러길래 나도 모르게 화를 내버렸어......」
「......그건 제 말투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히토리쨩이 대인관계가 서툴고 말주변이 없다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후후」
「갑자기 왜 그래?」
「아, 아뇨, 뭔가 이쿠요쨩이 귀여워서......
저 때문에 이렇게나 고민하고 계셨던 거네요」
온화한 미소에 어른의 여유를 내비치는 히토리쨩.
왠지 분하네.
「이쿠요쨩이 저를 좋아하니까, 고민하고, 질투도 하고,
속박하기도 한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았어요.
저는 정말로 사랑받는 존재였네요」
히토리쨩이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바람에,
괜히 멋쩍어져서 토라진 목소리를 낸다.
「좋아한다는 말을 안해주는 것도 불만입니다만」
「그, 그건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노력할테니까요......」
기다리는 건 싫다.
나는 생각이 나면 바로 행동에 옮겨버리는 타입이니까,
많이 기다려주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매일 아침 일어났을 때 히토리쨩이 옆에 있는
나날을 보낼 수 있다면, 조금만 참아볼까.
「......그리고 아까 전에 한 얘기 말인데요,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거예요」
「아까 전에 한 얘기?」
헤어졌다는 얘기요, 하고 히토리쨩이 말을 잇는다.
「......이쿠요쨩은 평행세계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세계를 뜻하는 말인데요,
저희는 한번 헤어지는 선택을 했지만, 당신과 당신의
고토 히토리는 그렇게 되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기,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요......」
「그 부분은 자신있게 말해줘야지」
「죄송합니다......」
침대 옆에 장식되어 있는 사진.
그 안에서 두사람은 굉장히 행복해 보인다.
히토리쨩이 이렇게나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이런 표정을 짓게 할 수 있는 미래의 내가 대단하기도 하고
살짝 질투도 난다.
묵묵히 사진을 보고 있자 히토리쨩이 내 손을 잡는다.
「아, 고등학생 이쿠요쨩도 귀여워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역시 어른이라서 그런가」
「이쿠요쨩한테 빡세게 훈련을 받았거든요......」
「꽤나 익숙해진 모양이네. 뭔가 불만은 없어?」
「아, 같이 목욕을 하는 건 자제해줬으면 좋겠어요......」
목욕? 에? 같이 하는 거야? 부럽다.
「히토리쨩은 같이 하는 거 싫어?」
앞으로를 위해 그 부분은 확실히 확인해두고 싶었다.
「시, 싫은 건 아니에요. 예전엔 더 자주 했으니까요......」
「어째서 지금은 같이 안하게 된 거야?」
「그게...... 솔직히 저는 옷을 벗기는 과정도 즐겁다고나 할까......」
「에...... 무슨 소릴 하는 거죠 고토 씨」
진지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인간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쿠요쨩이 먼저 유혹한 게 잘못이라구요!
욕조는 좁고 현기증이 날 수 있으니까 그만두자고 약속했는데!」
「헤, 헤에......」
「으아아아아아 미성년자인 이쿠요쨩한테 대체 무슨 말을!!
체포 당하겠어!! 미성년자를 성희롱한 죄로 사형당할 거야!!」
히토리쨩의 이목구비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간다.
다행히도 사진 액자 옆에 접착제가 놓여져 있어
그걸 사용해 얼굴을 복원 시켰다.
어른이 된 나는 준비성도 철저하구나.
......그건 그렇고, 이건 한가지 큰 수확이야.
「히토리쨩은 그런 것에 흥미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아, 원래는 흥미가 없었는데, 이쿠요쨩이 상대다 보니까......」
「또 금방 그런 소리 한다. 어른이 된 히토리쨩은
나를 놀리는 걸 좋아하는구나?」
「놀리는 거 아니에요」
히토리쨩이 능숙한 움직임으로 거리를 좁혀와 나를 눕힌다.
좋아하는 얼굴, 좋아하는 목소리, 좋아하는 냄새, 좋아하는 사람.
오감이 좋아하는 사람으로 채워진다.
「......지금부터 증명해 볼까요?」
「에...... 히, 히토리쨩?」
이렇게 가까이서 이런 국보급 얼굴을 보는 건
건강에 안좋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특히 심장 쪽으로.
키스도 그렇게 많이 해본 게 아니다 보니,
이정도 거리에도 마음의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그보다 아직 히토리쨩한테 덮쳐진 적도 없는데.
어? 이건 바람 피운 것에 들어가나?
이 사람은 확실히 히토리쨩이지만,
내가 모르는 10년 동안의 경험치를 쌓은 히토리쨩이다.
만약에 10년 후의 나와
16살의 히토리쨩이 키스를 한다면 어떨까?
아, 이거 바람이다. 안돼안돼.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히토리쨩의 뺨에 단풍잎이 늘어나게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하기를 0.5초.
나는 저항하기로 했다.
「안돼......요」
「오, 안된다는 말을 듣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네요」
「뭐?」
「죄송합니다」
히토리쨩이 몸을 일으킨 뒤 옆으로 나란히 눕는다.
아쉽네요, 라고 말은 하지만 전혀 아쉬워 하지 않고 웃는다.
그 웃음은 옆에 놓인 사진과 똑같은 웃음이었다.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대신 껴안아도 될까요?」
「이상한 짓 안한다고 약속하면......」
「안할게」
나는 히토리쨩의 품 속으로 쏙 들어갔다.
마치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았다.
너무나도 편안해서 잠이 왔다.
「이쿠요쨩 졸려?」
「응......」
「그럼 잘까. 괜찮아,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테니까」
일어나면 히토리쨩에게 좋아한다고 말하자.
그리고 어제 일을 사과해야지.
그렇게 작은 불화를 하나하나 해소해 나간다면,
어느새 26살의 히토리쨩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가장 좋아하는 향기에 둘러싸여, 나는 가만히 의식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