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치 더 락 마이너 갤러리
봇치 더 락! 총집편으로 입문한 뉴비의 후기 - 2편
마침 수요일에 한가하기도 했고,
뭘 공짜로 준다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저벅저벅 용산아이파크몰 CGV로 향했다.
지하철로 왕복 3시간 거리 따위는 영화가 삶의 일부로 스며든 나로서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생소한 영화의 쓸모없는 굿즈였지만 이런 시간낭비조차도 하나의 즐거운 취미였기에.
커다란 스크린에서 음악과 영상을 감상하며 가볍게 2시간을 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도 행복했다.
당시의 나한테 봇치는 딱 그런 의미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스크린을 통해 내용을 알기 전이었으니까.
'아, 이거 성우 싸인이었어?'
이런 심드렁한 감상과 함께 STARRY 캐릭터 간판을 한 번 훑고 난 뒤, 나는 관에 입장했다.
그리고 후원사 로고들과 CGV 광고가 끝나자마자 스크린에 비친 것은....
총천연색 핑크머리 소녀.
창작물에는 흔히 스테레오타입이라 불리는 개념이 있다.
쉽게 말해 뻔한 컨셉, 뻔한 구도, 뻔한 성격.
붉은색은 열정적이고, 파란색은 냉철하고, 보라색은 신비로우며, 흰색이나 검은색은 귀족적이다.
다들 색깔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는 것처럼.
그 중에서도 분홍색은 밝은 수준을 넘어, 유치찬란한 여아 상품을 떠올리게 할 만큼 가벼운 느낌의 색상이다.
혹은 반대로, 어른스러운 작품으로 가면 음탕하고 색욕에 사로잡힌 캐릭터가 띠는 색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크린에 비친 소녀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어깨가 축 처지고, 눈가에는 그림자가 드리웠으며,
걸핏하면 미어캣처럼 놀라거나 바닥에 들러붙어 굼벵이마냥 꿈틀댔다.
놀이터 그네에 홀로 앉아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동지를 찾는 모습은...
이런 말하기엔 스스로 우습지만, 마치 나 자신을 보는 듯했다.
'혹시 저 사람은 나만큼 망하지 않았을까?'
'나 혼자만 불행한 건 아니겠지?'
시쳇말로 인싸들이 다니는 홍대거리와 용산 부근을 자주 왕래하다보니
젊고 활기찬 커플이나 단란한 가족들을 자주 마주한 입장에서 스스로 어깨가 움츠려들었고
나 자신만큼 불행하고 외로운 사람은 없을까 곁눈질하던 내가 꼭 현실의 히토리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히토리는 흔히 일상물의 핑크머리 소녀가 유치한 효과음을 내며 선보이는
'근심 걱정 따위 잊고 발랄하게 살자!'
하쿠나 마타타 정신과는 거리가 광년 단위로 떨어진 아이였다.
그래서 아무 배경지식도, 심지어 캐릭터 이름조차 모르고 관에 들어간 내가
놀이터 그네의 분홍머리 소녀에게 감정이입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쟤도 나랑 똑같은 처지네....
어느덧 주름이 지기 시작한 입 꼬리가 씰룩대고 있는데, 나는 이질감을 마주했다.
"기타아아아아아아!!!!"
눈을 반짝이며 달려오는 사이드테일 금발 소녀였다.
히토리는 별다른 노력도 하질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네에 앉아있을 뿐인데, 먼저 히토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달려왔다.
처음엔 그 금발 소녀가 미웠다. 정말 미웠다.
찌질하게 비칠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이 반사적으로 꿈틀댄 것이다.
'왜 나한텐 안 오는데?'
구인난으로 인해 청년실업이 들끓는 사회에서 길거리 스카우팅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알면서도,
나는 창작물의 캐릭터한테 묘한 질투심을 느낀 것이다.
30대 중반이나 먹은 아저씨가 2D의 고등학생한테.
그런 한심한 생각에 자괴감을 느끼고 있는데, 순간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히토리가 등에 맨 기타.
애니메이터들이 그린 단 하나의 현악기가 내 기억들을 되짚어주었다.
히토리는 감히 남에게 먼저 말을 걸진 못했지만,
적어도 남이 먼저 걸어주길 바라며 기타와 음악 CD를 내보이는 노력과 정성을 기울일 줄 아는 아이였다.
'말을 걸어줘!'
개그씬으로 웃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이건 그녀의 음울한 성격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이었다.
인정받기 위해. 누구와 어울리기 위해. 양지로 발을 내딛기 위해.
하지만 난 뭘 했지?
자신만만하게 원고를 누구에게 보인 적이 있었나?
저를 뽑아주시면 롤링처럼 이 출판사를 한국의 블룸즈버리로 만들겠습니다! 같은 포부를 비친 적이 있던가?
내겐 히토리를 비웃을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히토리는 내게 있어 단순한 일상물의 개그 주인공이 아니었다.
타고난 천성 때문에 우물쭈물하다가 남의 부탁을 거절조차 못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떠밀리다시피 휩쓸리는 성격 덕분에 흩어진 밴드를 규합하기도 하고
한쪽 눈이라도 뜨며 길거리 공연을 성공리에 끝마치는,
겁쟁이인 척하지만 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용감한 소녀였다.
어느덧 나는 홀린 듯이 그 관심종자 음침 소녀에게 빠져들었다.
흔히 일상물 캐릭터에게 입덕하는 계기와는 달랐다.
귀여워서가 아니다. 물론 귀엽긴 했다.
웃겨서가 아니다. 물론 웃기기도 했다.
그러나 고토 히토리라는 소녀가 내게 특별히 다가온 이유는,
그리고 이 <봇치 더="" 락!="">이라는 애니메이션이 깊은 감명을 준 원인은,봇치>
사회의 구석으로 내몰린 주인공 찐따 소녀가 실은 나 같은 루저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몰입하라는 장치가 아닌
너는 정말로 세상에 맞서 용기를 내본 적 있냐고 묻는 따끔한 일침임과 동시에
너 역시 할 수 있다고 등을 떠밀어주는 위로였기 때문이다.
3편에서 계속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