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치 더 락 마이너 갤러리

(팬픽) 눈꽃송이

팡파카틸토트
2023-04-02 02:15:49
조회 551
추천 20

장르: 일상물

성분: 키타봇치



​두터이 옷을 껴입게 만드는 겨울 추위는, 역설적으로 삶의 맨살을 드러낸다. 몸과 마음을 이불 속의 안식으로 향하게 하는 영하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통해, 다른 누군가가 삶을 대하는 본연의 형태를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마치 눈꽃송이 모양이 저마다 다양하듯, 우리네 인간들이 인생살이를 꾸려나가는 행색도 저마다 다양하다. 그런데, 눈꽃송이는 관심을 갖고 눈여겨보지 않으면 다 고만고만한 얼어붙은 물의 잔향으로만 보이기 마련이다. 손가락보다 작은 눈송이 또한 그토록 섬세한데, 어찌 열 손가락을 지닌 사람의 마음은 촘촘하고 세밀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대체로 타인이란 존재는 사람들에게 삶이란 도로변을 지나가는 행인에 지나지 않기에, 다들 이 진실을 무시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 소녀, 키타 이쿠요는 달랐다. 자신의 친구 고토 히토리를 만나러 가는 도정의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히토리에게 가지각색의 따스한 상념들을 품는다. 그리고 히토리라는 사람의 삶의 맨살에 대한 그녀의 의견과, 그녀가 히토리에게 향하고 있는 마음의 방향은, 이해라는 과녁의 가장 중심에 뚜렷한 자국을 남기며 꽂혀 있다.



키타는 이젠 매우 익숙해진, 수수하지만 귀여운 형식미가 있는 슈카 고등학교의 교복을 입고서, 눈 덮인 길 위로 발을 옮기고 있다. 고즈넉히 뻗어있는 침엽수의 가지들이 양쪽의 풍경을 장식한 이 겨울길을 걷는 그녀의 기색은 실로 경쾌하다. 보폭이 좁지만 속도가 빠른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에 매고 있는 기타 케이스가 살며시 흔들린다. 겨울의 잔잔하지만 차가운 바람에, 붉은 머리칼이, 친구를 만나러 가기 때문에 들뜬 그녀의 마음처럼 나부끼며 살랑인다. 새하얀 배색으로 물든 이 눈의 세계와 키타 이쿠요의 적색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부조화는 세계와의 불화가 아닌, 그녀가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활기찬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에 대한 하나의 증명으로 기능하고 있다.



"히토리쨩~"



한 움큼의 아주 미묘한 비일상.



이는 키타의 음색에서 드러나는 어떤 특별함이다. 키타의 목소리는 평소에도 발랄하다. 히토리를 애칭으로 부를때의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입혀져 있을 뿐이다. 사람과 얽히는 것을 기꺼워하는 그녀의 평소 성정, 거기에서 비롯된 밝음- 자연스레 품고 있던 그 본래의 빛무리를 흘러넘치게 만들 무언가가.



불안한 낯으로 공터의 벤치에 앉은 채 땅바닥을 내려다보던 히토리. 이 분홍빛 소녀의 언제나처럼 긴장된 얼굴 근육이 키타의 도착을 확인한 직후에 조금은 풀어진다.



"키타 씨.. 안녕하세요.."



소심한 인사를 전하는 히토리의 입꼬리는 마치 미소를 짓듯이 조금 올라가 있다. 사람을 대하는게 어색한 히토리는 미소 또한 어색했다. 만들어낸 웃음이 아닌 진솔한 기쁨이 담겨 있었음에도, 마치 만들어낸것처럼 보인다.



사회가 익숙치 않은 이 소녀의 알아채기 힘든 감정 신호를 키타는 금새 알아챈다. 오랜 나날의 어울림 덕분이다. 키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히토리의 옆자리에 앉는다.



"저기.. 키타 씨, 이런걸 묻는게 실례가 안된다면.. 안된다.. 면.."



"궁금한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도 돼."



기묘하게 반복되려던 히토리의 말을 키타는 도중에 끊어낸다. 이 칼같음은 지금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한철처럼 쌀쌀맞지는 않다. 오히려 부드러움에 속한다. 키타는 히토리를 이상한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키타에게 있어서 히토리란, 혼자서 밤하늘 한 켠에 떨어져 있는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별이다. 낯선 눈부심을 지닌 별과 잘 지내기 위해 익힌 수단을 썼을 뿐이다. 히토리가 '봇치 타임'에 빠지는 걸 막기 위해서는 때로 대화를 단호하게 앞으로 밀고 나갈 필요가 있는 법이다.



"...왜 겨울방학인데 교복을 입고 있는 건가요..?"



히토리는 약간 망설이다 사소한 의문을 던졌다.



"아, 이거? 선생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학교에 다녀왔거든. 그래서야."



키타는 잠시 벤치에서 일어서서 한 차례 빙글 회전해보인다. 교복의 소매와 밑단이 펄럭인다. 치마의 아래쪽에서 훤히 드러나는 키타의 허벅지를 보고 히토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린다. 다시 자리에 앉은 키타는 그런 히토리를 의아해하며 쳐다본다.



"'히토리쨩, 왜 그렇게 고개를 돌리고 있어?



"아무 것도 아니에요.."



키타는 살짝 갸웃했으나, 배려하기 위해 굳이 추궁하진 않는다. 잠시 돌아오지 않는 해답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보았지만, 정답에 이르진 못했다. 이윽고 평정을 되찾은 히토리는 다시 고개를 원위치시킨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교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이해했어요..  그럼... 기타 케이스를 메고 있는 이유는 뭔가요? 오늘 우리 밴드 연습이 있는것도 아닌데.."



"뭐? 기타 케이스?"



키타는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낸다. 히토리의 질문 그 자체에 놀란 건 아니다. 그저 자신이 기타 케이스를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을 뿐이다.



"실수야.. 히토리쨩이랑 만날 때에는 기타를 가지고 다녔던 경우가 많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이번에도 똑같이 했나 봐.."



키타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있어서 매우 능수능란한 소녀이지만, 이렇게 살짝 얼빠지고 어설픈 면도 있다. 그녀와 가까운 사람들만이 볼 기회가 있는, 흔하지는 않은 모습이다.



"기타를 짊어지고 다니면 무게때문에라도 진작 눈치채기 마련인데.. 아, 혹시 그 케이스 안에 기타가 없는건 아니죠..?"



등에서 느껴지는 케이스의 무게는 매우 가벼웠다. 그 또다른 깨달음의 순간, 키타는 기운을 잃어 마치 흐물흐물한 해초처럼 된다.



"...없어.."



히토리가 말한 의문은 정곡이었다. 차라리 기타가 케이스 안에 있었더라면 '밴드를 하는 입장에서 이건 습관과도 같다' 같은 식으로 폼잡을 수라도 있었을탠데, 이제는 실수를 포장해서 도망칠 겨를도 없다. 부끄러움이 겨울 추위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키타의 경쾌함을 잠시 앗아간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키타의 눈길이 잠시 히토리에게 멎는다. 키타의 맑은 눈동자에 비친 히토리는 풍경과 하나가 되어 있다. 이 독특한 소녀는 그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눈밭 속의 눈사람처럼 자연스레 주위와 섞여 있다. 그렇게 존재감을 숨기는 태도가 삶에 단단히 붙박힌 마냥,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하지만 키타는 주위가 아닌 히토리만을 본다. 키타가 벤치에서 일어선 상황이기에 혼자서 외톨이처럼 앉아있는 히토리. 그러나 키타에게 있어서 눈앞의 이 외톨이는, 남들로부터 격리된 가엾은 외톨이를 뜻하지 않는다. 남들 속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의 개성으로 칠해져 있어서, 어디서든간에 그 모습을 보고 쫓아갈 수 있는, 외따로인 한 명의 특별한 사람. 그것이 키타가 내심 머금고 있는 진실이다. 그 존경하는 외톨이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게 키타에겐 조금 염려스럽다.



"..혹시 비웃는 거야?"



기묘하게 비틀린, 애써 웃음을 참으려는 의도가 훤히 보이는 히토리의 미소. 키타는 그 끝자락을 곁눈질하며 불안한 듯 묻는다.



"그.. 그게 아니라.."



지금 느끼고 있는 달콤 쌉싸름한 감정이, 언어로 맺히지 못하고 생각 속을 맴돈다. 히토리에게 있어서,말을 전하는 건 무척이나 서투른 영역이다.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말을 만들어냈다. 십수년의 생애동안 마음의 겉이라면 몰라도 속을 전할 대상조차 없었던 히토리에게 있어서, 말이란 가보지 않은 등불 없는 밤길이다.



"비웃은게 아니라.. 실수한 키타 씨가 귀여워서 그래요."



그럼에도, 그 길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앞에 서서 이끌어준 존재가 있었다. 지금껏 먼저 히토리에게 속 깊은 곳에 있는 비밀들조차 전해주며, 마음을 나누는 따뜻함을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 히토리의 눈 앞에 있는 키타 이쿠요다. 키타가 특유의 밝음으로 채워주었던 히토리의 일상. 그 일상이 준, 벽장의 컴컴함과는 다른 빛깔의 기쁨들. 함께 나누었던 즐거움의 경험들이, 히토리가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는 걸 가능케 한다.



"귀.. 귀여워..? 내가?"



귀엽다는 칭찬. 그건 키타에게 있어서 익숙한 말이다. 귀엽다든가 예쁘다든가, 그런 칭찬들은 인기 많은 키타로서는 수없이 들어온 흔해빠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키타는 이렇게나 뜨겁게,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낀다. 흔한 말일지라도 그런 발언이 드문 사람에게서 듣는 건, 이토록 마음이 저릿저릿할만큼 쑥스러운 일이다.



"...네."



히토리는 잠시 몇 초간, 그동안 읽었던 만화들의 대사따위를 떠올리며 키타의 귀여움을 표현할 만한 찬사의 말을 찾아보았지만, 어떤 대사든 지나치게 유려하여 서투른 히토리가 써먹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나온 대답이란, 간단한 '네' 한 마디다. 단순한 한 음절이었지만, 절대로 감정의 고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었다. 미사여구를 말에 치렁치렁 붙이는 것에 익숙치 않은 히토리에겐 이 단호함이 최선이다. 또한 키타의 귀여움에 대한 의심 없는 긍정이기도 하다. 결속 밴드에 들어오기 전의 히토리였다면, 다짜고짜 상대방에게 귀엽다 한 것이 실례는 아닌지 우물쭈물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칭찬을 아무에게나 아무렇지 않게 하지는 못한다. 상대가 키타이기에 가능한 현재다.



"고마워..."



히토리의 언어가 과거와 달랐듯이, 키타의 언어도 과거와 달랐다. 본래의 키타라면 쾌활하게 칭찬을 긍정했을 터이다. 하지만 수줍음이 여전히 키타의 몸을 지배하는 중이다. 삐져나온 말은 미약하게 중얼거리는 감사였다. 익숙한 친구가 보내온 낯섦 속에서 키타는 신비함을 느낀다. 겨울인데도 몸과 마음이 뜨겁다. 여름의 신열같은 뜨거움이 아닌 이불의 포근함같은 따스함이다.



히토리가 전한 언어의 모포가 그토록 키타를 견고히 감쌌으나, 빈 기타 케이스를 들고 온 실수와, 갑작스레 귀엽다는 소리를 들은 예상외가 합쳐진 겸연쩍음은 거세다. 키타는 히토리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괜시리 공터 한 켠을 본다. 그곳의 바닥에는 이틀 전 내렸던 눈이 아직도 완전히 녹지 않은 채 깔려 있다. 도시의 미관을 어지럽히는 아무렇게나 뿌려진 눈이 아니라, 마치 그곳이 정위치인 마냥 자연스러운, 풍경과 어울리는 눈이었다. 히토리와 키타의 둘만의 시간 아래 깔린 새하얀 카펫이다. 그리고 순백이 물들인 대지를 볼때조차 키타의 사고는 히토리와의 이 한때에 멎어 있다.



시신경에 닿는 눈의 시린 미학이 마음의 통제할 수 없는 달아오름을 식혀주었다. 키타는 그제서야 나무 벤치의 히토리 옆 자리에 다시금 앉는다. 텅 비어있어서 탈피한 허물처럼 흐느적대는 기타 케이스를 히토리와는 반대편에 놓아둔다. 히토리와 키타가 앉은 자리 사이의 거리는 몇 센치 가량이다. 멀지는 않으나 몸이 닿을만큼 가깝지는 않다.



"히토리쨩, 그래서 오늘 날 부른 이유는 뭐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한, 얼마간의 정다운 부끄러움들의 순간을 거친 후, 그제서야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왔다. 키타의 질문의 반쯤은 순전한 의문이었다. 먼저 이런 만남을 제안하길 어려워하는 히토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그 이유란 무엇일까 하는 궁금함.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기대였다. 히토리가 만들어준 이 특별한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새로움을 꺼리지 않는 키타는 한창 설레고 있다.



"저.. 그게.. 실은.."



히토리는 손을 꼼지락대며, 머뭇거리면서 말한다. 그 일거수일투족에 키타의 흥미가 집중된다. 이 머뭇거림은 평소대로의 '봇치' 스러운 머뭇거림일까, 아니면 혹시 정말로 특별한 내용을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망설임일까? 그러나 키타는 집중하는 티를 내진 않는다. 히토리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도록.



"용건이 있어서 부른 건 아니에요.. 그냥.. 키타 씨를 만나고 싶었어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이유. 하지만 그 답은 키타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실망은 커녕 완전히 예상 궤적을 벗어난 데서 오는 놀라움이 있다. 여름방학 때에는 같이 놀러가자고 말도 못 꺼내던 히토리가, 이유도 없이 그저 만나고 싶어서 오늘의 약속을 청했던 것이다. 잔잔히 잦아들었던 키타의 심박이 다시금 달음박질을 한다. 심장이 전신에 순환시키는 혈액은 키타를 또다시 달구지만, 피하고 싶은 뜨거움은 아니었다. 언제까지나 잠겨있고 싶은 흡족함의 온천이다. 히토리가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키타가 얼마나 많은 몰두와 궁리를 했던가. 키타가 줄곧 히토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편하게 대해도 괜찮다는 녹색 불의 신호는, 기어이 말 없이도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었다.



"키타 씨..? 왜 그래요..? 호호혹시 제가 너무 질척대서 화난 건 아니죠...?!"



마침내 닿았다, 라는 결과가 이끌어내는 기쁨에 키타가 취해 말을 잃은 사이, 히토리는 홀연히 불안해진다. 히토리가 키타와의 관계에서 먼 길을 왔다고는 하나, 이토록 사람과의 어울림에 있어서 까마득한 데까지 온 것은 처음인 만큼, 이 길이 언젠가는 끊어지진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함도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때가 찾아올 때마다 불청객같은 초조는 불쑥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니야, 히토리쨩."



키타는 몸을 옆으로 돌려, 히토리를 더없이 진지하게 건너다본다. 불과 몇 센치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키타와 히토리의 몸 사이 거리가, 더욱 줄어든다.



"그냥.. 기뻐서 그래."



무엇이 어찌하여 기쁘다는 것인지, 낱낱이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소망은 음성이 되지 못한다. 키타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말로 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복작복작하게 얽힌 다채로운 기분들이 거기에 있었다. 다행히도 사람에게 있어서 심정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언어뿐만이 아니다. 키타는 급격히 히토리와의 거리를 좁혀 옆에 딱 붙더니, 히토리의 왼손을 자신의 오른손과 잇는다. 키타의 손은 이 겨울날 장갑을 끼지 않았는데도 온기에 겹다. 히토리가 키타에게 전해준 인연의 훈김을, 이젠 히토리가 또렷한 피부의 감촉으로써 다시 전해받는다.



히토리는 당황스러웠다. 싫음의 당황이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찾아온 이 온기를 어떻게 여겨야 할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답을 구하러 키타의 옆얼굴을 응시해보아도, 키타는 살며시 미소짓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무언은 한동안 이어졌다.



"저랑 이렇게 있으면.. 어색하고 심심하지는 않나요..?"



키타가 히토리에게 이어둔 어울림의 길, 그 너비는 무척이나 넓었지만, 겁 많은 봇치에게 있어선 이쑤시개 위를 걷는 것마냥 위태롭게 와닿는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그동안 함께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릴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래도 히토리는 좁게만 보이는 문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그 대신 묻는다. 이해하고, 다가가기 위해.



"음.. 평소라면 분위기 띄우려고 뭔가 재밌는 소리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괜찮아.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히토리쨩이랑 같이 있는게 기뻐."



키타의 손가락이 히토리의 손가락에 더욱 강하게 엉겨붙는다. 키타보다 아득히 오래 전부터 기타의 현을 쓰다듬어왔던 존경스런 사람의 손가락. 한편으로는, 항상 어둠 속에서 홀로 움츠려있었던, 꼬옥 붙잡아서 빛 아래로 이끌어주고 싶은 사람의 손가락.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자."



"네. 키타 씨가 괜찮다면야.."



히토리는 키타를 흉내내서, 자신의 손에 얽혀든 키타의 손가락을 좀 더 힘을 주어 쥐어본다. 말 없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어색함의 무음이 아닌, 안정된 고요였다. 전해야 할 마음들은 맞닿은 피부의 체온으로 충분히 전해지고 있다. 닿아 있는 것은 손 뿐만이 아니다. 몸을 붙이고 앉아 있었기에 어깨나 옆구리도 살짝이지만 마주친다.



히토리는 생전 해본 적 없는 경험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고요가 깊어갈수록 당혹은 사라지고 평온이 커져갔다. 말로 이루어진 불확실한 약속들이 만연한 사회라는 세계. 그곳에 서투른 히토리에게 있어서, 말보다 정확하진 않지만 더욱 생생하게 그곳에 존재하는 키타의 감촉은, 마치 자기 방에 있는마냥 안정되는 것이었다. 히토리가 자기도 모르게 키타에게 진전의 기쁨을 주었듯, 키타도 자기도 모르게, 히토리에게 편안한 마음의 집이 되어주었던 셈이다. 키타 또한 깊은 평온에 잠겨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그저 함께 있는것만으로도 행복한 상태에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관계란 본디 사회적 신호의 끝없는 교환으로 이루어지며, 침묵이란 이러한 신호의 부재를 의미하고, 이는 어색함과 불편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두 사람이 침묵 속일지라도 함께 있을 수 있는건, 이러한 세상의 법칙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마음을 내어놓은 까닭이다. 확인도 없고 승인도 없이, 단지 직접 맞닿을 뿐인, 허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마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바로 옆에 닿아 있는 키타의 따스함을 난로 삼아 계절의 냉기도 잊고 꾸벅꾸벅 졸던 히토리는, 갑작스레 들리는 부스럭 소리에 눈을 뜬다. 키타가 텅 비어 있는 기타 케이스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실수의 부끄러움은 이제는 키타에겐 없는 모양이다.



"잘 생각해 보니, 내가 빈 기타 케이스를 들고 온 실수를 한 건 히토리쨩 탓이잖아? 히토리쨩이랑 기타를 가지고 만나는 데 익숙해서 그런거니까."



해가 꽤나 저물었고, 겨울 바람은 한층 더 냉혹해진다. 바깥에 나와있던 인근 주민들을 대다수 들어가게 만든 한기 속에서도, 키타와 히토리가 함께 있는공간만은 얼음장에 침식당하지 않는다. 함께 몸을 다가붙이며 생명의 온도를 공유하는 덕분이다. 그렇기에 키타는 이토록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히토리에게 빙긋 웃음지으며 말할 수 있다.



"어.. 그건.."



"그러니까 히토리쨩이 책임져!"



분명 옛 시절이라면, 정말로 뭔가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줄 알고 겁먹었을 히토리. 하지만 이제는 히토리도 키타의 이 말이 장난임을 안다. 키타 이쿠요라는 사람의 본질을 잘 안다. 그렇기에 실수하지 않고, 그 '책임'이라는게 무엇인지 살짝 기대하며, 조곤조곤 묻는다.



"어떻게 책임지면 되나요..?"



"앞으로도 계속 내 친구로 있어 줘! 그리고 겨울방학 끝난 뒤에 학교 오는게 싫어서 결석하면 안 돼! 그럼 내가 히토리쨩을 학교에서 못 보잖아!"



우정을 이어가자는 의미 외에는 별다른 뜻이 없어 보이는 요청. 거기에는 키타와 히토리만이 알 수 있는 숨겨진 뜻이 깃든다. 결속 밴드에 대한 이야기는 제외하고서 학교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학교란 료와 니지카도 있는 밴드와는 달리, 키타와 히토리가 둘이서만 함께 있는 공간이다. 어찌 보면 키타와 히토리 사이의 순수한 우정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학교에서 히토리와 쭈욱 친구가 되고 싶다는건, 결속 밴드의 실력파 기타리스트도 아니고, 벽장에 숨기를 좋아하는 소심한 은둔자 봇치도 아닌, '고토 히토리' 라는 그 사람 자체와 우정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키타의 친애는 히토리에게 씌워진 그 어떤 사회적 역할도 다 배제하고서, 히토리의 있는 그대로만을 분명히 담아내고 있다.



"아하하.. 노력해 볼게요.. 그리고.. 계속 키타씨랑 친구로 지내는건 제겐 당연한 일이에요."



히토리 역시 키타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다. 키타와 히토리는, 서로를 동경하며 함께 정신적으로 성장해온 관계다. 히토리는 키타의 인기 많은 삶을 동경하고, 키타는 히토리의 특별함을 동경한다. 서로의 이 동경은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은, 히토리에게 있어서 키타는,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아닌 한 명의 소중한 친구다. 마음의 깊은 골짜기 자리마저 내줄 수 있을 정도로 아끼는.



"약속 꼭 지켜야 되는거 알지?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는 약속이지만, 지키기 어려운 약속은 아니다. 둘 다 서로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기에, 달력이 무수히 넘어가도 둘 사이의 인연은 자연스레 지속되어 갈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약속된 매혹적인 운명을 실감한다. 오늘 부끄러움때문에 몇 번이고 서로의 눈을 피했던 키타와 히토리의 시선이 단단히 겹친다. 키타는 히토리를 보고, 히토리는 키타를 본다.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윤곽뿐만이 아니라, 상대의 본연의 존재 또한 제대로 바라보면서 좋아하고 있다. 서로간의 다정한 받아들임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시간, 만나서 별달리 한 일도 없었음에도 무척이나 행복했던 시간은 불가능했다.



여전히 공터의 벤치에서 몸을 붙인 채인 둘의 머리 위로 눈발이 흩날린다. 요즘 철에 갑작스러운 눈내림은 흔하므로, 키타도 히토리도 놀라지 않았다. 이제 오늘은 해산해야 할 시간이다. 지금이 해가 거의 기운 때일지라도, 두 사람에게 시간은 여전히 넉넉하다. 하지만 눈발의 거셈을 보니 날씨가 심상치 않을것 같아, 이만 오늘의 회합을 마치기로 했다.



"다음에 또 봐요. 키타 씨..!"



"다음이 언제야? 겨울방학 끝난 뒤? 그건 너무 멀어!"



"그럼 며칠 뒤는 어때요?"



"좋아!"



몇 마디의, 짧지만 정겨움이 충만한 인사를 나누고, 키타는 먼저 자리를 뜬다. 눈이 내리는데도 춥지도 않은지, 키타는 몸을 떨지 않고 힘차게 뛰어간다. 그 발걸음 하나하나에는 활기찬 생명력이 충만하다. 처음 이 공터에 찾아오기 전부터 넘치던 생명력이었으나, 히토리가 준 소중한 시간에 힘입어 더욱 넘쳐흐르게 되었다. 키타가 보이지 않게 될때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리기에, 히토리는 그 자리에 선 채 계속 키타를 향해 손을 흔든다. 키타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양쪽에 뻗어있는 휑한 길을 경쾌함으로 채우며 달려나간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히토리에게 답을 해준다.



계속 하늘을 향해 뻗고 있던 히토리의 손바닥에 불현듯 차가운 무언가가 닿는다. 눈송이였다. 기온이 무척이나 낮았기에 눈은 히토리의 체온과 만나도 바로 녹지 않는다. 아직 형체를 유지하는 눈을, 히토리는 호기심이 생겨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쉽게도 육안으로는 눈꽃의 구체적 형태를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어딘가, 눈을 정말 좋아하는 익명의 누군가는 적합한 도구를 통해 눈꽃의 형태를 경탄으로 살펴보리라.



히토리는 지난 겨울에는 눈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토록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외톨이인데, 눈은 그 형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자신은 눈발보다 못한 존재라며 자학하던 그때의 기억은 이젠 히토리에게는 아픔이 아니다. 고토 히토리라는, 공터 한 켠에 적막하게 내려앉은 한 송이 눈꽃을 알아준 사람, 키타 이쿠요가 있으니까. 키타의 곁에 있으면 히토리는 항상 이해받는다는 기분을 느낀다. 오늘도 키타의 배려가 없었다면 대화가 어긋났을지도 모를 경우가 대체 몇 번이나 있었던가. 그만큼의 배려가 가능한 까닭은, 키타가 히토리를 진실로 알고 싶어했고, 결국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거의 보이지 않게 된 키타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며, 히토리는 큰 감사를 마음에 새긴다. 새긴 것은 감사뿐만이 아니다. 키타가 히토리를 알아주었듯, 히토리도 키타의 이해자가 되고 싶다.



히토리의 머리 위에 눈이 내려앉아 살짝만 쌓인다. 히토리는 그걸 털어내려다가, 한 움큼 집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방금처럼 다시 본다. 이윽고 실감한다. 자신에게도 이해하고 연모해야 할 어떤 한 눈꽃이 있음을.곁에서 몇 번이고 봐도 결코 질리지 않는 그 모습을 언제까지나 보고 싶은 이 열렬한 마음을.



"나의 눈꽃송이."



지금 막 키타의 모습이 사라진, 눈이 흩뿌려지는 먼 길 저편의 새하얀 풍광을 히토리는 미소지으며 보고 있다. 눈에 비치는 건 창백한 겨울이지만, 떠올리고 있는 건 방금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히토리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소중한 소녀다. 소중함이 내뱉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만큼 그윽하게 깊어져버려서, 결코 키타가 옆에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말을, 무심코 중얼거린다. 곧이어 자신이 매우 부끄러운 말을 했음을 알아차린 히토리는 얼굴을 감싸고 벤치에 털썩 걸터앉는다. 부드러운 함박눈이 히토리에게 포개진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올 겨울에는 친애하는 눈꽃송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가사를 한번 써 보겠다고, 남몰래 다짐한다. ​


<눈꽃송이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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