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씹스압 글많음 추석 특선 음악사 -재즈 2-

Cubase
2022-09-09 23:34:51
조회 698
추천 21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electricguitar&no=1009011&exception_mode=recommend&page=1

이거 보고와.


1.이지재즈 논란

재즈가 조금 난해한 음악이다 보니 유입을 위한 음악 이지재즈가 존재하기 마련. 이를 두고 논란이 일기도 하는데

재즈와 댄스를 소재로 한 라라랜드의 ost는 대부분 이지리스닝 계열 재즈다 보니 '편안하고 잔잔하니 좋구먼'하는 부류와

'이..이게 뭔 재즈여..쯧쯧..에잉.."하는 부류가 있었어. 또, 색소포니스트 케니지를 두고 팻 메스니가 비난한 일화도 있어

'잼민이들이 재즈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라는 질문에 팻은 '(케니지의 음악을 언급하며) 세상에서 가장 병신같고 재즈도 아닌 음악이다'라고 발언하고 퍼지면서 팻에게 사람들이 마구마구 질문하니까 장문의 정리글을 올렸지


이번 논란에 대해 요약하겠습니다.

팻 메스니?.2022.09.09 22:11:32

케니지 음악을 너희들은 재즈로 오해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인류가 만들 수 있는 최악의 음악이다. 반박시 님말이 다 틀림. 닥치고 개추박고 꺼져 ㅗㅗ




일부 재즈 강경파들에게는 케니지의 음악이 단조롭고 재미없고 상업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 하지만 케니지는 분명 가사도 없는 악기 연주곡만으로 사람들이 재즈에 입문할 수 있게 해주고 상업적으로 인정을 받고,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케니지의 음악 자체가 비난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마일즈 데이비스가 한 말이 있어.

"평론가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은 좋든 나쁘든 귀담아 듣지 않는다.

가장 깐깐한 평론가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연주한다면 너문 ㅏ무의미한 일이지 않은가."

뮤지션들은 이 말처럼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자신들의 음악을 발전시켜왔지.

재즈에 입문하면서 이게 정통 재즈다 아니다 보다는 여러 장르를 들으면서 즐기는게 좋지 않을까?

2.재즈의 분화

1930년부터 40년대까지의 재즈 유행기를 책임졌던 '스윙'에 대한 이야기.

듀크 엘링턴의 명언이 있어."스윙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스 데프픗"

이처럼 재즈에서 스윙은 상징적인 존재야. 스윙은 흔들거리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몸을 흔드는 듯한 독특한 리듬감을 뜻해

재즈가 가지고 이쓴ㄴ 본질적인 리듬 요소를 말하며 지금도 절대다수의 연주자들이 스윙을 하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리듬이며 재즈의 한 장르야

스윙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빅 밴드야. 10명 이상으로 구성된 빅 밴드가 댄스홀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흥을 돋구기 위해 스윙을 연주했지. 그래서 이 시기를 빅밴드의 시대라고도 해. 절대로 사창가에서 연주하던 음악이 아니라 상류층들의 춤을 위한 음악이였어!!!!!!!!!!!!!!!!!!!!!!!!!!!!


스윙은 재즈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는 평을 받아. 그렇게 된 데에는 사회적 배경이 있어.

"금주법"

1920년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됐어, 소비를 목적으로 한 알코올의 제조, 판매, 운송을 금지했는데 판매를 금지했지 자기 집에서 술을 소유하고 마시는 것 자체는 금지가 아니었어. 시행 직전 사재기현상도 일어났고 미국 홈파티 문화를 만든 법이기도 해. 그런데 하지 말래서 이새끼들이 과연 안할까?

오히려 갱단에서 술을 밀수하고 만들어서 민간에 파는 등 갱단 사업을 키워주는데, 이 때 갱단들이 자신들이 운영하는 클럽의 넓은 홀과 무대를 채울 빅 밴드를 고용했지. 클럽이니까 고귀한 오케스트라보다는 흥겨운 재즈를 연주했으면 했으니까.


1929년 미국 월가에서 주가가 급락하더니 경제 대공황이 발생해. 기업과 공장들이 싸그리 문을 닫고 은행이 파산하고 서민들도 평균 절반으로 소득이 줄었지.

그래서 클럽에서 더이상 빅 밴드를 유지하기 힘들었고 흑인 연주자들은 무대에 설 자리가 없어 구두 닦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어

한 때 클럽을 누비던 탑 연주자들이 대공황 이후 거리에서 굶어 죽는 일도 있었어.

결국 금주법은 실패한 정책이었어. 루스벨트가 취임한 이후 바로 폐지했고 갱단도 시들해졌으며 경제가 복구되며 빅밴드가 다시 모이기 시작하고 억눌린 흥이 폭발하며 스윙이 시작되지.


비밥

영원히 이어질 듯 한 스윙이 점점 시들어갔어. 빅밴드는 소규모 밴드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클럽의 분위기도 댄스에서 감상분위기로 넘어갔지.

이를 모던 재즈로의 변화라고 칭해. 사실 빅밴드가 사라진 이유는 세계대전 때문에 연주자들이 다 군입대를 해버렸거든..

다시 돌아올 땐 이미 새 시대로 나아가고 있어 그들이 설 자리는 없었어


연주자들은 춤을 위한 음악을 연주한다는 사실이 불만이었어. 그들은 스윙이 아니라 비밥이 오는 것을 더 기다리고 즐거워 했을 수도 있지.

뉴욕 브로드웨이 52번가에는 작은 클럽이 밀집해잇었는데, 밤만 되면 연주자들이 이곳으로 집결했어

그래서 건물도 작고 사람도 없으니 4~5명정도로 축소하고 즉흥 잼을 하는 형식으로 바뀌게 돼며 자유로움을 표현하다 보니 기존보다 더 격하고 흥겨운 음악이 탄생해.

그중에서도 민튼즈 플레이하우스라는 52번가 클럽에서 이젠 아예 춤을 추지 못하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템포를 오락가락하며 연주하는 특이한 리듬을 탄생시키는데 이어 독특한 코드 진행과 솔로잉을 뿜어대며 이는 더이상 댄스음악이 아닌 자체가 예술로 거듭나는 때였지.

그리고 비밥이 탄생하는데 기여한 인물 헨리 민튼과 그의 친한 동료 델로니어스 몽크, 하워드 매기, 로이 엘드리지, 테드힐도 비밥연주자야.

비밥은 비밥에서 자주 쓰이는 음정 디미니쉬5도 음정을 입으로 내면 비밥비밥소리가 난다고 해서 비밥이라고 불렀어. 비밥 이전엔 꾸밈음으로 쓰이다 주요음으로 바뀌었어. 정통 블루스에서는 b3도, b7도 음을 쓰다가 비밥을 통해 3도 5도 7도를 모두 블루노트로 만들게 돼.

사실 비밥은ㅇ 1940년대 중반 생겨나는데 갑작스럽게 등장한 음악이 아니라 민튼즈에서 시작한 비밥으로 점점 유행이 옮겨가다가 스윙에서 비밥으로 바뀌게 되는거지. 절대로 스윙의 인기가 갑자기 꺼진게 아니었어


최근 들어서도 비밥은 재즈의 첫번째 관문으로 통해. 복잡하고 난해한 비밥을 이해하지 못하면 재즈 자체에 대한 파악이 어렵기 때문인데 이 비밥이 너무 난해해 스윙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

대표 뮤지션으로는 찰리 파커, 버드파웰,델로니어스 몽크 등이 있어. 우리가 아는 쿨 재즈나 하드밥 등은 모두 비밥 이후에 탄생한 음악이야. 그래서 비밥이 결정적인 게임체인저로 통하지.

비밥은 음악적 특징뿐만 아니라 구조 자체도 크게 변화했어. 편곡보단 즉흥이 강조되고 클라리넷,트롬본, 코넷을 다시 트럼펫 색소폰이 대체했어 왜냐면 그 3가지는 너무 빠르고 강한 음악에 취약했거든




쿨 재즈

이런 비밥의 행보에 신물이 나던 사람들은 차분한 음악을 원했고 점점 재즈를 찾는 사람이 마니아층으로 축소되자 연주자들 중 일부는 다시 차분한 음악을 복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게 돼서 전쟁이 끝난 후 조선업으로 황금기를 누리던 미 서부를 중심으로 새 재즈가 탄생하는데, 이를 쿨 재즈, 지역을 따서 웨스트코스트 재즈라고 해.

쿨이라는 명칭을 쓴 건 1949년 마 일즈 데이비스의 <쿨의 탄생>이라는 앨범이 시초였어. 사실 이 땐 기술력의 문제로 12곡을 모두 담을 수 없어 50년대에 가서야 풀앨범이 출시됐는데 그 때 마침 쿨재즈가 대유행을 할 때였고 그래서 쿨재즈라는 명칭을 그 때 붙이게 되지. 정작 마일즈 본인은 쿨재즈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

그리고 이도 마찬가지로 스물스물 유행이 옮겨가며 상승세를 탔어. 재즈는 항상 이렇게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전개돼. 사람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재즈를 찾자 다시 재즈로 몰려들고 탄생한 지역이 부유한 특성을 가져 여유를 가진 음악이라는 특징이 있어.


하드 밥

반대로 서부의 움직임을 바라보던 동부 뮤지션들은 이 인기를 어떻게 다시 끌어와야 할까 고민했어. 예술에서 대중음악으로 다가가기 위해 그들이 창조해낸 음악이 바로 하드 밥 이었지. 웨스트코스트와 반대로 이스트코스트 재즈라고도 불러. 비밥의 격렬함은 유지하되 세련됨과 대중성을 강조한 하드 밥을 탄생시켰지만 그렇다고 하드하다는 뜻이 아니라 비밥의 연장선이라는 뜻으로 하드를 썼어. 그래서 대중들의 인기를 다시 끌어오는데 성공해. 이는 그 예술성을 버리기 힘든 흑인연주자들의 자존심에서 탄생한 명작이 아니었을까


또, 기술력이 좋아져 SP에서 LP로 넘어가자 20분 이상의 긴 연주를 담을 수 있게 되자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어 어떻게 더 음악적인 매력을 강조할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관악기에서 드럼,베이스, 피아노가 강조된 시대가 와.




프리 재즈

하아.. 결국 또 난해한 음악이 등장하고 말았어. 예술지향과 대중성 지향 음악의 유행이 번갈아가며 돌던 시점에 1960년대 흑인 인권 시위가 전개되면서 음악 또한 극단적으로 치닫아. 로자 파크스의 몽고메리 버스시위도 유명한 일화인데 이로 인해 프리재즈가 탄생하며 격정적이고 심오한 음악을 표현했지.

그 중 대표적으로 프리재즈의 창시자,흰색 플라스틱 색소폰을 트레이드마크로 들고다니선 오넷 콜맨. 사람들은 그가 연주하는 음악을 재즈가 아니다.라고 평가했어.

물론 일반적인 재즈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진 감도 있었지만 그런 평가가 무색하다는 듯이 두번째 앨범 라는 파격적인 음반으로 성공을 거두며 프리재즈의 시대를 열지. 퀸텟에서 피아노가 빠진 색소폰코넷 베이스 드럼 콰르텟으로 변성되며 코드와 조성을 없애버리지. 이는 테마의 멜로디를 자유롭게 연주하는 형식으로 완전한 '즉흥'의 틀이 갖춰져. 그래서인지 이 어렵고 불안불안한 음악에 사람들은 반감을 가지기도 했지.


또, 코드에서 벗어난 피아노는 프리재즈에 편승해 타악기와 같은 리듬과 박자의 역할을 맡고, 스윙 좆까라는 식으로 냅다 던져버리지. 오로지 즉흥 연주만으로 프리재즈가 전국을 지배했어. 이때문에 다시 어려운 예술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오넷콜맨이 만들어낸 프리재즈는 재즈의 개념을 확장시킨 중요한 키포인트야.

다른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이 재즈시장으로 뛰어들게 만들었거든. 이 때를 계기로 재즈는 미국이 아닌 전세계의 음악이 돼.



후..일단 여기까지야. 다음 마지막 글에서 전세계에서 전개된 재즈와 재즈아티스트들에 대한 일화로 마치도록 할게.

그리고..개추와 댓글 오네가이시마스 관심이 글싸개를 기쁘게 하는 데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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