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렉트릭기타 마이너 갤러리
[헥스작문대회] 여름의 그녀
길었던 장마가 그쳤다.
하늘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해가 쨍쨍했고 매미 우는 소리가 아스팔트를 타고 공명했다.
'시발.. 시발..'
긱백의 어깨끈이 땀을 타고 계속 흘러내려 쓰라림이 느껴졌다. 한 손에 들린 페달가방은 거의 땅을 타고 끌리기 직전이다.
겨우겨우 도착한 합주실의 앞에는 우리 밴드의 드러머 박박자가 담배를 피고 있었다.
'뭐해. 안 들어가고.'
'어 그게 말이지..'
박자는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듯이 하늘을 향해 한숨을 푹 쉬었다.
'뭔데? 설마 또 백근음이야?'
내 말에 박자는 포기한듯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여자를.. 데려왔어.'
'여자?'
백근음은 우리 밴드 안에서도 특히 여자를 밝히는 녀석이다.
하지만 언제나 말로만 여자여자 노래를 불렀지, 직접 여자를 데려오거나 하는 일은 여태까지 없었다.
'하 시발, 알겠어. 내가 가서 지랄하고 올게. 합주실에 드는 돈이 얼만데..'
나는 긱백과 페달가방을 박자에게 맡기고 경사 높은 합주실 지하로 내려가 곧장 빌린 방으로 향했다.
'야, 백근음! 이 씹새...'
문을 쾅 열어 닫고 큰소리로 백근음을 꾸짖으려하자 내 눈에 쭈뼛쭈뼛 기타를 들고 앉아 있는 소녀가 비춰졌다.
조금 앳되보이는 얼굴에는 난처함이 느껴졌다.
'이 분은...?'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나있던 화가 상실되고 벙찌고 말았다.
'아 뭐야? 왔냐? 소개시켜줄게. 여기는 이인주. 내 과 후배야.'
근음의 소개에 인주는 일어나려다 보면대에 하키채 모양의 기타 헤드를 부딪히고 말았다.
'아.. 조심하세요. 저는 김일붕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인주라고 해요.'
헤드에 기스가 났을까 유심히 살펴보는 인주를 뒤로 하고 난 근음에게 한숨을 쉬며 말을 걸었다.
'그래서 왜 데려왔는데..'
'아 이번에 인주가 기타를 사서 말이야. 책 보면서 하는데 어렵다길래. 너 좀 소개시켜줄려 했지.'
'그런건 미리미리 좀..!'
근음에게 화를 내려하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인주가 눈에 걸렸다.
'하하. 미안미안. 아무튼 좀 가르쳐줘라.'
근음의 태평스러운 말에 인주는 기타를 내려놓고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 힘드시면 괜찮아요.. 괜히 온거겠죠 저..'
반쯤 울상이 된 인주를 보니 더 이상 화를 낼 기분도 안 들었다.
'일단 저희 합주 끝날때까지 기다려 주시겠어요?'
가르쳐주는건 고사하고 더이상 합주시간이 줄지 않도록 하는게 먼저였다.
그렇게 언제나와 같은 우당탕탕 합주가 시작됐다.
최대한 신경쓰지 않으려 했지만 기타 치는 내 모습을 보고 눈동자를 반짝이는 인주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합주가 끝나고.
'우리는 먼저 갈테니까 인주 좀 잘 가르쳐주세요~ 일붕쌤~'
'하.. 넌 내가 절대 가만 안둔다.'
웃으면서 도망치는 박자와 내가 걱정스럽다는듯 바라보는 나머지 멤버들과 헤어지고 인주와 나만 남았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합주실을 잡아서 해야할지..'
'합주실이요..? 어..'
난처하다는 표정의 인주. 하긴 막 대학생이 된 인주에겐 합주실 비용이 부담스러울 만하다.
인주는 고민하다가 곧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 집에서 하면 안될까요?'
'네?'
순간 온갖 생각이 스파게티마냥 뒤엉켜서 난 돌처럼 굳고 말았다.
'저 혼자 살거든요. 앰프? 도 있고..'
'아 그러면 그게 좋겠네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지만 흔히 말하는 인싸들에겐 이 정도는 별거 아니겠지.
20년 넘게 여사친조차 없던 대마법사 지망생인 나기에 하는 별 거 아닌 걱정일거다.
우리는 결국 인주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내 집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합주실과는 별로 멀지 않은 거리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인주가 사는 원룸 문 앞에 도착했다.
'들어오세요.'
처음으로 들어가는 여자의 방. 최대한 신경안쓰는 척 연기하며 난 인주가 준비해준 의자에 앉았다.
폰을 보며 태연한 척 기다리다보니 어느샌가 인주는 똘똘이 앰프에 기타를 연결하고 튜닝을 하고 있었다.
'그 기타 어디서 사셨어요.'
'무신사에서요. 옷 보고 있었는데 기타가 있길래.. 원래 조금 관심 있었는데 조금 장벽을 느꼈었거든요. 근데 생긴것도 귀엽고 유튜브에서도 좋다고 해서..'
헥스 이 녀석들.. 마케팅 하나는 기가 막힌다. 친구였다면 사도 그런걸 사냐면서 엄청 놀렸겠지만 처음보는 사람한테 그럴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저 혹시 혼자서 어디까지 해보셨나요?"
'c코드랑 e코드랑.. 하다보니까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데 f코드는 거의 소리가 안나서요. 손이 아프기도 하고..'
흔한 f코드 장벽이군. 보통 다 여기서 기타를 당근행하는거겠지.
'한 번 잡아 보실래요?'
인주는 쭈뼛쭈볏 지판에 손가락을 올리고 소리를 냈다.
드르륵-
명쾌한 뮤트음에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왜 그러세요?'
'아니요. 저 처음 기타 칠 때 떠올라서. 그 첫 손가락부터 천천히 확실하게..'
그렇게 긴장이 풀린 나는 인주에게 코드 잡는 법부터 천천히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중간에 저녁으로 치맥도 시켜먹고 하다보니 조금씩 말도 트이고 내 쪽에서 말도 놓게 됐다.
술김에 백근음의 뒷담을 시작하자 인주도 웃으면서 내 이야기에 동참해주기 시작했다.
여자는 다 인싸일거라고 편견을 갖던 내게 인주는 편견을 깨주었다.
의외로 사람 사귀기 힘들어하고 혼자서 있는걸 좋아하는 나랑 비슷한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정신을 좀 차려보니 막차가 끊긴지 한참 된 시작이었다.
'아 막차가 끊겼나보네.. 택시라도 타야하나.'
야간할증과 거리를 생각해보니 택시 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였다.
인주는 곰곰히 생각하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취기로 상기된 얼굴로 인주는 말했다.
'그럼 자고 갈래요?"'
'그 그건 좀..'
'혹시 저 맘에 안드세요 오빠..?'
'어?'
생각보다 많이 취했구나.. 그렇게 맥주도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아무래도 주량이 약한 모양이다.
온갖 마귀들이 내 머리 속을 침투하려고 했다.
하지만 성숙한 어른이라면 이럴 때일수록...
털석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에 눕고 말았다.
아니 눕혀졌다. 내 위로는 인주의 상기된 얼굴이 드리워졌다.
내 얼굴에 흐르듯이 인주의 머리카락이 올라왔다. 샴푸의 향에 살짝 몽롱한 기분조차 들었다.
'...스 해보셨어요?'
'어?'
'...스요.'
...스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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