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렉트릭기타 마이너 갤러리
기타 연습이라는 행위에 대한 횡설수설
노래기
2025-04-26 20:36:19
조회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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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기타 연습의 목표는 숙련이다
1. 반복을 통해
2. 특정 기술을
3. 전보다 더 낫게 수행
결국 최적화된 능력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목표에 닿기 위한 것
여기서 목표란 정의된 답으로 볼 수 있을 것임
완결성을 예비하는 행위
B. 여기서 연습은 자연 상태에서의 벗어나 어떤 자동회된 것으로의 쉬프트로도 볼 수 있겠음
결핍에서 충만으로 없음에서 있음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창조로
여기서 낭만적으로 말한다면 결국 컵이 있어야 물은 담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음
자연의 잠재된 것을 끌어내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샘물과 생수
C. 현실화된 가능성
1. 가능성이
2. 어떤 조건에 의하여
3. 드러나는 것
유충 - 번데기 - 성충
입문자 - 연습 - 기타리스트
여기서의 문제란 가능성은 이미 예비된 완결성을 향해 선형적으로 달려가는 존재라고 본다는 것이겠다는 것임.
그럼 연습이라는 것은 아까 말한 자연 상태에서의 벗어남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 상태의 반복과 강화일 뿐인가?
내재된 경로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밟는 과정인가?
유충은 온도 수분 고치 영양분 시간 그런 것을 조건으로 둔다
D. 가능성의 가늠 - 사후적으로 이해되는 조건
사후적이라는 것은 겪고 완결된 도착지에서 따라온 발걸음을 길로 둔다고 보는 것이므로 일견 반대되는 개념같지만, 선험적으로 이해된다는 것과 동치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음.
이해의 구조 속 장을 선험적이라고 두었을 때 이미 사후성은 곧 예견됨일 수 있음
그럼 사후성과 선험성은 싸움 붙일 것이 아닌 건가?
예견된 구조 속에서의 경험이 다른 것이라고 주창하더라도 이것은 개인 속에서의 지극히 제 중심적인 경험의 토로일 뿐, 선험성의 구조에서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여기서 선험성을 다시 정의하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의 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E. 기타를 잘 치는 게 뭔데요 그래서
느리게도 빠르게도
약하게도 강하게도
이런 색채로도 저런 색채로도
슬프게도 활기차게도
새롭게도 고전적으로도
설득력있는 것을 기타를 잘 친다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설득력이라는 것은 타자의 수용과 평가에 기반한다는 것임.
여기서 비판을 할 수 있겠지만
예술이란 뭐임?
표현이잖음
표현이 뭐야? 자기표현은 왜 이뤄지는가?
도달하려는 시도 아님?
그것이 신성이 되었든 청중이 되었든 이질화된 내가 되었든
혹은 도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되었든
닿으려는 시도 자체를 보든
순수하게 수용 그 자체 청자 그 자체에만 집중하여서
어떤 편지가 쓰여졌을 뿐 부쳐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아무 의미 없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왜 "편지"를 선택했는가? 라는 질문를 다시 던질 수 있을 것임
그렇다면 결국 그 동적인 무언가, 그 움직임 자체를 다시 기타 연주로 환원했을 때,
F. 왜 잘 치고 싶은데?
연습의 동기는 뭐임
잘치고싶은거아냐
왜 그런 동기가 발하는 거지?
다양한 가능성이 있겠지만 흑백으로 나눠보자면
1. 못 치는 게 싫어서 - 비판과 거부감
2. 잘 치는 게 좋아서 - 수용과 즐거움
1은 결국 결함의 수정으로서의 연습인데,
1-1과 1-2로 나눠서
1-1. 나는 이것보단 나은 사람인데?
1-2. 나는 원래 좀 그런 놈이야.
정도로 무식하게 보자면
둘 다 가능성 신뢰의 가닥에서 이해했을 때
1-1은 결국 이보다 '나은' 가능성을 배신하고 싶지 않은, 결국 배신이라는 키워드에서 성장의 측면으로 보이는 자기 신뢰의 감각일 것이고
1-2는 규정한 자신의 자연 상태의 가능성에서의 자기혐오적인 스태틱한 것 (혹은 반대로 고꾸라지는) 것을 배신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예견성에 대한 절대성을 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음
그럼 여기서 아주 끔찍한 사태가 벌어짐
1-2는 어떤 내면적 동기로서 기능할 수 없음.
그러나 양가적으로 못하는 게 싫은 것도 싫으나 못하는 게 좋은 것도 좋다. 무너진 것에 대한 충성
그런 근본적인 안에서의 충돌은 결과가 자기조롱과 학대 끝의 무너짐 (기접)으로만 나타나겠지? -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이 과연 그에게서 발현한 그만의 것일까?
자기혐오 속의 절대성은 하나의 방어였을 것이라고 봄
인간으로서 보호하고자 하는 나의 가능성 있는 존재로서의 가치
그것이 부정되는 것은 외부에 의한 파괴니까
선제적인 패배를 선언해버리는 방어 전략
이 방어의 구조는 결국 첫째의 자기가치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희망은 있을 것임
고정된 하나의 목표에서 벗어나서 그저 움직이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라든지 (그저 기타를 쥐는 나와 누운 나에서부터 연주에서의 모든 결과-그것이 틀림이든 옳음이든 그저 쳤음이든-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까지)
혹은 정말 고전적으로 나의 부족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거나... 그건 공자님 말씀이니까 좀 쉽지 않네 일붕이한텐
그럼 넘어가서 2. 내가 잘 치는 게 좋아서
여기서는 자기가치의 기묘한 점이 드러남
나는 부족한 존재다 라는 것은 여전히 존재하는데, 이것이 수용과 '가능성의 나' 로 해석되고 있다는 것임
그러나 이것마저도 따지고 보면 하나의 자기 구제인데, 그래서 나의 시점에서 최고의 형태는 그저 안팎의 존재로서 기타를 치는 것 그냥 그 자체라고 적을 수 있겠음
그저 존재로서 모여 있는 하나의 사건들 새로운 흔적 자연스러운 흐름 받아들일 것조차 없는
그저 친다 왜? 치니까
G. 그래서 어쩌라는거샘
내 내재된 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갈구하는 것도 결핍을 메우는 것도 어떤 타자화된 결과에 대한 의지도 연습으로 나타나지만
기타를 칠 때 나는 치야호야도 받고
더 잘나진 나의 미래도 보고
순간 음악에 빠져들기도 하고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기도 하고
일붕이로서 재밌기도 하고
"그래도 걔보단 내가 잘 치지"를 느끼기도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생성해내는 것이면서도
그저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잖음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과연 기타 연습은 숙련을 위한 것인가?
그렇다기보단 연습은 연습으로서 그저 행해질 때 숙련으로'도' 향하는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겠음